오랜만에 핸드폰을 정리했다.
게으른 하루를 보낼 요량으로 이불 속에 콕 박힌 채.
무용지물이 된 뮤직앱을 지웠다.
음악을 잘 안 듣게 되어 작년에 애플뮤직을 해지했다. 다운로드하면 오프라인으로 들을 수 있는 강점에 비싼 돈 주며 꽤 오래 구독상태를 유지했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핸드폰을 만지작대다가 구석에 모아둔 앱을 열어보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묵혀둔 판도라의 상자를.
여행할 때 쓰던 앱이 쏟아졌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여행할 때의 내 모습이 보였다.
돌다리도 두들겨대는 나.
안전불감증이 뭐니? 먹는 거니?
어찌나 안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던지 우습게도첫 페이지에 떡하니 외교부 앱과 보험관련 앱(노랗게 지운 거)이 있었다.
나라 안팎에서 두루 거지인 나.
누가 봐도 걷고 또 걷는 뚜벅이 티내는 지도앱. 다음 장엔 당연히 구글맵도 있다.
그리고 이동과 숙소 관련 앱. 모두 저렴이 버전이다. 예산 내에서 최대한 아껴 길게 여행하자가 모토였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두 번째 페이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가이드북 없이 다니므로 최소한의 정보를 얻을 가이드앱과 소통을 위한 통번역앱, 돈돈돈 환율계산앱, 와이파이없이도 확인 가능한 예약사항 저장앱, 사진 저장용 클라우드앱 등.
원활한 여행을 뒤받침하는 필수앱들이 쫘악 있다.
노랗게 지운 부분과 사진 첨부를 안 한 세 번째 페이지는 일기앱과 게임앱 등이 있다. 왠지 부끄러워서 사진은 뺐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앱을 정리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면 과연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까?
모르겠다.
작년 코로나 시국으로 접어들기 전부터
당분간 긴여행은 삼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터라
발이 묶인 지난 20여개월이
몹시 괴롭다거나 못견디게 힘들진 않았다.
다시 여행을..
또다시 떠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긴 시간과 큰 돈을 투자할 만큼 여유가 생길까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 고려라는 현실에 밀렸다가
가고 싶은 곳이 아직 남았나로 잠시 이어졌고
가면 뭐하겠니라는 자조로 끝이 났다.
물론 가 본 곳보다 안 가 본 곳이 절대적으로 많지만 떠나고 싶게 하는 강렬한 열망을 품은 곳이 더는 없다. 뭐, 추후에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잘 모르겠다.
코로나 전, 오랫동안 염원하던 남미를 다녀왔다. 몇 년을 낑낑대며 준비해서 부푼 마음을 안고 그곳에 다녀왔다. 실망스럽게도 인도차이나 반도(내가 제일 사랑하는 곳)를 갔을 때 느꼈던 설렘의 반도 들지 않았다. 새로운 것과 반가운 것 투성이었지만 묘하게도 설레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무난히 잘 지내다 적당히 좋은 걸 보고 돌아왔던 것 같다.
여행 내내 머리 한 켠에 든 생각은 당분간 여행은, 특히 해외여행은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였다.
문제는 나였다.
여행은 언제나 바쁜 일상에 대한 보상이었다. 혼자라는 자유로움과 텅 빈 플래너라는 여유의 상징이었다.
여행이 내게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였던 적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나의 매일이 지루해진 거. 뭘 해도 하품이 나는 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 코로나를 원망하고 욕해봤지만 진짜 대상이 나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너덜해진 건 나 자신이었다.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다.
여행을 가기 위해 나의 하루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이상한 결과가 마음에 든다.
다시 음악을 틀어야겠다.
나를
여행이 가고 싶어
안달나게
만들어야겠다.